영화를 보고 감독을 만나는 리뷰 : 왕가위

December 27, 2020 · 9 mins read

영화를 보고 감독을 만나는 리뷰

영화에 대한 단상

기획자나 마케터에게 영화는 가장 좋은 교과서다.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배우도 좋아야 하고, 연출이나 음악도 좋아야 한다. 또 그래픽이나 배우들이 입는 옷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영화는 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이 모든 것을 습득하고 관찰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콘텐츠다

⁃ 노희영의 브랜딩 법칙 中

어떤 사람이 만든 아웃풋들이 배울만 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들의 책이나 인터뷰는 챙겨서 보는 편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영화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나 역시도 항상 비슷한 생각으로 영화를 소비하기에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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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티비나 인터넷에서 홍콩영화가 한 시대를 풍미했었다, 장국영 유덕화를 비롯한 잘생긴 홍콩배우들에 아시아가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노라 하고 역사책 마냥 여기저기서 주워 듣기만 했었다. 영화사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홍콩 영화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게 있다면 이소룡과 성룡으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다.

그러나 이제 내게 홍콩영화는 홍콩에 대한 낭만과 세기말 감성을 가득 담은 중경삼림과 화양연화가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딘가는 말도 안되게 좁은 골목들과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화려한 네온사인 또 그것과 상반되게 또 어딘가는 명품샵이 즐비하며 고층 건물들이 가득한 풍경이 펼쳐지는 그런 조금은 언밸런스하고 이상한 나라가 내가 경험했던 홍콩이였다.

그저 그 나라에 가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한다기에, 나도 그 에스컬레이터를 탔었다. 물론 그 당시엔, 중경삼림을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게 무슨 영환지도 몰랐다. 그럴수 밖에 없는게 중경삼림은 1994년 개봉작인데, 그때 나는 2살이였다.

중경삼림_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사랑은 변한다. 어제 파인애플을 좋아했던 사람이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 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 중경삼림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싶다 - 금성무

왕가위 이미지

왕가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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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고 습하던 홍콩의 공기가 잊혀질 때쯤 중경삼림을 봤다. 왕가위를 처음 만난 영화는 중경삼림이다. 중경삼림을 본 느낌은 내가 홍콩에 갔을 때 느낀 그 느낌 그대로였다. 그토록 사람들이 열광하는, 걸작이라고 평가 받는 중경삼림을 본 솔직한 내 감상평은 이상하다 였다. 이상한 포인트는 크게 2가지 정도가 있는데

  1. 와 무슨 개연성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대체 이 영화로 무슨말을 하고 싶은거야? 근데 대사는 왜 이렇게 촉촉하고 감성적이냐, 이게 뭐가 재밌다는 거야 대체..금성무랑 양조위가 너무 잘생겨서 얼굴은 재밌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린듯이 끝까지 다봤네? 뭐지, 지루한거 딱 질색인데 마치 영화를 보는데 그냥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느낌은 조명 때문인가 이상한 슬로우 효과들도 잔뜩 있고 뭔지 모르게 흐릿한 장면 연출과 분위기 뭐지 싶었더니 캘리포니아 드리밍으로 분위기를 너무나도 완벽히 완성시킨다, 아 그냥 사람들도 이걸 즐기는 건가

물론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2가지 이야기를 다루기에 그럴수도 있지만, 이 영화를 통해 뭘 말하고 싶은지 이해가 도통 안가는데도 끝까지 보다니, 결론은 그냥 이상했다로 정리된다. 그냥 뭔지 모를 비주얼 색감 음악 분위기에 홀려서 끝까지 봐버렸다.

이런게 미장센의 마력인가 싶다가도 분명 웨스앤더슨 감독 같이 나 졸라 잘해! 라고 외치는 듯한 각잡힌 균형과 조화에 대한 감탄도 아니고, 콜미바이유어네임 같이 서정적이고 뭔가 도시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어딘가 모르게 순수하게 아름다운 그런 느낌도 아니였다.

왕가위의 영화는 뭔가 흐릿하고 정돈 되지 않고 무질서하지만 정교하고 뭔가 홀리는 빈티지스러운 매력이라고 해야하나, 그냥 왜 홀리는지 잘 모르겠어서 미쳤다고 해야 하나 라는 생각에 혼자 빠졌다. 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에 중경삼림이 왜 매니아층이 많은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화양연화_花樣年華 :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

내게 ‘‘화양연화’’ 라는 단어는 BTS의 앨범보다도 최인아의 인터뷰로 기억된다.

지금껏 인생 최고의 장면을 묻자 1초도 안 돼 “2012년 12월 6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제일기획을 그만 둘 때다. 보통 임원들은 ‘내일부터 나오지 마’ 하면 죄인들마냥 사라지는 게 싫었다. 짐도 비서가 챙겨 보내주고, 환송회도 회사 밖에서 하든지 말든지였다. 누군가에겐 임원이 꿈일 수 있는데,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에도 근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쯤 회사를 관두겠다고 얘기했다. 환송회가 열리는 직원식당에 모인 몇 백명 직원들은 동영상도 준비했다. 좋은 일 있을 때 허그하는 서양 문화가 부러웠다는 그녀를 수백명의 직원들은 장미꽃을 하나하나 건네며 안아줬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오늘이 내 인생에 화양연화다.”

- 최인아 대표 은퇴 인터뷰 中

심지어 이 인터뷰를 너무 감명깊게 읽어서 기록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화양연화’라는 단어는 내게 양조위와 장만옥으로 기억될 거 같다. 중경삼림을 봤던 강렬한 인상이 희미해질때 쯤 그는 화양연화로 내 인생에 다시 찾아온다. 4K로 리마스터링 되서 재개봉 된 화양연화를 봤다.

두번째로 만난 그의 영화, 화양연화 : In The Mood For Love

모르죠? 옛날에 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어떻게 했는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거기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이고 진흙으로 봉했다고 해요. 그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 양조위

내게 자리가 있다면, 내게로 올건가요? - 장만옥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왕가위 이미지

왕가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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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화면에 흰글씨로 화양연화 라는 한자가 크게 뜨는 순간부터 강렬했다. 화양연화를 보면서 느낀 것도 중경삼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이야기는 내 관점에선 단순하고 원초적이다. 외도하는 배우자를 둔, 두 명의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둘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그가 얘기하는 스토리보다 장면과 연출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압살 당했다. 뭐 여기저기 검색해보면 여러가지 메타포와 장면 해석이 있는데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보는 순수한 내 관점에서 제일 인상적이였던 건

홍콩의 좁디 좁은 실내와 골목들, 홍콩만의 모습인 그런 공간들을 장만옥의 아름다움과 양조위의 눈빛을 담는데에 너무나도 감각적으로 사용했으며 아름다움을 배가 시켜서 담아냈고, 이게 내가 예전에 별로라고 느꼈던 그 홍콩 특유의 모습인데 그걸 너무나도 다르게 담아내서 진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양조위의 어딘가 쓸쓸해보이는 눈빛도 씬과 분위기에 너무 잘 녹아들었다. 물론 잘생기기도 했지만 난 이미 중경삼림을 통해 양조위라는 배우의 눈빛이 얼마나 깊은가, 매력적인가 감탄했었지만 화양연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양조위가 나온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영화표를 사버렸지만 그래도 화양연화에서 만큼은 양조위보다 장만옥의 매력이 더 느껴지는 영화라 생각한다.

어떤 예능에서 치파오를 입으면서 화양연화를 패러디 한다고 하는 장면을 스치듯 본 기억이 났다. 지금 영화를 보고나서 다시 생각하니 화양연화 속 장만옥은 감히 패러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입고 나온 치파오는 약 30벌이라고 하는데, 영화의 미술감독인 장숙평이 하나하나 핏을 검수하고 모두 세심하게 고르고 디자인 했다고 한다.

장만옥의 모습을 한 장면 장면 만드는 데에 준비 되는 5시간이나 걸렸고 때문에 장만옥이 불만도 엄청 많았다는 뒷 얘기도 있다고 한다. 또 치파오는 감정선에 따라 패턴이나 컬러도 변한다고 하고 어떤 치파오는 질감을 위해 종이로 제작된 것도 있다고 한다.

왕가위, 장숙평, 크리스토퍼 도일

보통 인상 깊은 것들을 적어서 기록하는데, 이 영화는 감명깊은 대사를 적기보다는 인상깊은 장면을 찍어 보관해야할 거 같은 그런 영화였다. 두번째 영화까지 보고 나니, 나에게 왕가위의 영화는 스토리보다 그가 그려내는 장면들을 그저 감상하자라는 새로운 영화 감상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기에 왕가위 감독은 물론이고 미술감독인 장숙평과 촬영감독인 크리스토퍼 도일을 언급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궁금해서 심지어 그의 데뷔 30주년 인터뷰집도 읽어보게 되었다. 그들이 걸작을 만들 수 밖에 없는 동료애는 물론이고 함께 만들어 가는 배우들, 이제는 대스타가 되어버린 양조위,장국영,장만옥,공리와 같은 배우들에 대한 애정어린 이야기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이 전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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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가 절대적으로 존경하는, 혹시 조금이라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의 미술감독이자 의상 디자이너 겸 헤어와 메이크업 아티스트이고 또한 영화 편집자, 까마득한 시절부터 왕가위의 제일 친한 친구이고 또 제일 중요한 협력자인 장숙평이다. 왕가위는 그를 ‘내 영화의 수호천사’라 부른다. 왕가위가 작가였던 시절, 그와 장숙평은 함께 술을 마시며 밤새 영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어떤 영화인이 맘에 드는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등을. 둘이 얼마나 잘 맞는지 바즈 루어만 감독과 그의 훌륭한 미술감독인 아내 캐서린 마틴 커플을 방불케 할 만큼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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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밤, 우리는 LA에서 옛날 영화 특유의 꿈결 같은 장면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아름답게 찍히는 게 너무 신기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아시겠지만 아름다운 걸 좋아해서 그렇게 찍는 게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찍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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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갔던 홍콩과 그가 보여주는 홍콩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왕가위가 보여주는 홍콩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였다. 그래서 대단하다. 그저 고유의 홍콩다움을 이토록 아름답게 담아 낸다. 이제는 나도 그 좁은 골목들이, 그 거리가, 무질서한 네온사인들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나 미장센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까막눈을 자기만의 세계에 유입시키고 그의 필모그래피나 출연 배우들에 대해 검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홍콩에 다시 한번 가고 싶어졌고 그의 영화가 재개봉 한다면 난 어김없이 영화표를 살거다. 재방문과 재구매 유도까지 성공하다니, 영화를 모르긴 몰라도 그는 마케터뷰에서 다룰만한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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