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레이스는 길다-나영석

October 18, 2020 · 5 mins read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 어디론가 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_ 나영석

토요일, 토요일인데도 맨날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늦잠도 못자는 바보멍청이가 나다. 아직 잠이 덜 깼지만 의도치 않게 같이 살게된 초록 생명체들 물부터 챙겨주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 조차도 아이러니 하다. 맨날 어떻게 저렇게 남한테 관심없고 정내미가 없냐고 말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말이 떠오른다.

예전에 기숙사 살때도 친구들이 보고 항상 너는 뭐 이렇게 물건이 없냐? 라고 자주 말했었다. 음 내 것을 많이 두지 않는다. 물건 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이 그렇다. 많은 것들을 내 바운더리 안에 두지 않는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의 코어에는 아직은 가볍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아직은 달리고 싶은데, 가벼워야 잘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는 배우고 싶은 어른이 해주는 기분 좋은 응원같았다.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 - 나영석 에세이

1.

지위가 높아진다는 건, 아무리 좋게 말해도 남의 공을 빼앗아 먹을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예전엔 책상에 앉아 입으로만 일하던 부장님들이 그렇게 미웠는데 어느덧 내가 부장님들처럼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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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상을 5년정도 더 살아보니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고민은 늘 생긴다는 것. 중요한건 그 고민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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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좋은 프로그램의 조건

  1. 새로울 것 2. 재미있을 것 3. 의미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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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영석 PD와 강호동의 첫 프로그램이 바닥을 칠 때도 강호동은 묵묵히 자기 역할에만 집중했다. 전혀 투정이나 제작진의 참견도 없었다. 그는 프로였다. 선수는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나머지는 감독이 알아서 하는거 아닙니까? 이 얘기를 듣고 탄복하고 말았다. 운동선수 출신다운 명언 아닌가, 한마디로 프로페셔널이다.

구단과 계약할지 신중하고 고민하고 따져본다. 이런 저런 계약 조건도 내건다 하지만 일단 계약이 끝나면 운동에 집중한다. 운동이 나의 몫, 어떤 전략과 전술을 활용할지는 온전히 감독의 몫, 나에게 부여된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에 따르는 결과는 받아 들인다. 백전백패하는 감독을 만났어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이 감독을 믿고 시작한 것 아닌가 왜 그것밖에 안되냐고 탓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그 시간에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선수를 보면 어떤 감독이라도 힘을 안 낼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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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프로는 결과로 얘기해야 하는 것,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임무를 완수 해내는 것이 목적이지 임무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는 관심 대상이 아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돈을 받고 하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값을 해야한다. 내가 꿈꾸는 것들 날 매료하는 것들 단지 좋아서 하는 일들, 이런것들은 잠시 서랍속에 넣어둔다. 우선 한 사람의 몫의 피디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최소한 돈값은 하는 제대로 된 기능인이 되자. 꿈이나 이상 같은 건 그 다음에 생각하자. 그렇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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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인의 인생을 궁지에 몰아 넣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옵션이 부족한데 한 가지라니,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반면 장점은 단 한가지가 있다. 그런데 그 장점이 실로 매혹적이다. 즉 죽기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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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실로 쿨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성공, 실패를 따져가며 일했어, 재밌을 거 같고 꽂히면 하는거지 1박 2일 시작할 때는 성공할 줄 알았나 뭐, 그냥 우리끼리 즐거워서 한 거잖아, 이번 것도 똑같아. 나는 드라마는 처음 써보는 건데 의외로 재밌더라 이게, 망하면 망하는 거지 뭐

여기서 뭔가로 얻어 맞은 듯 멍해지고 말았다. 이게 뭐지 싶다. 그뒤로 나눈 이야기들은 사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된 친구가 무심코 내뱉은 이대답에는 뭐 하나 틀린 말이 없다. 나도 후배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다. 일은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니고 가슴이 명령하는 거다. 성공을 좇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두근거림을 좇아서 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나는 그동안 왜 잊고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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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는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경력이 아까우니 모험은 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언은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나 자신에게 들이대던 잣대는 아니었을까, 그래도 1박2일 피디인데, 유명한 사람인데, 성공을 거두었던 인물인데 그러한 무게에 그동안 짓눌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들로 머릿속만 채운 채, 가슴으로 두근거리기 전에 머릿속으로 재단하려 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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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말하는 내내 가슴속의 무언가가 요동치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우정 작가를 만나 이야기하고 나서야 요동치던 것들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두근거림. 내가 좋아서 하는 일들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론 두근거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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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그때의 그 두근거림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거구나. 나의 머리가 여러 현실적인 고민과 그에 대한 핑계거리를 찾느라 발버둥치는 와중에도 나의 몸, 나의 가슴은 계속 이걸 찾아 헤매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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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성공이나 실패보다는 우리가 진정한 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했던 시절, 그래서 즐거웠던 바로 그 시절. 바로 그 때의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다. 다시 만끽하고 싶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알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디어 답을 알게 된다. 그때처럼 다시 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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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레이스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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